
책 소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강요배의 삶과 예술을 응축한 산문집이다. 강요배가 평생 그려 온 2,000여 점의 그림과, 그림에 담긴 뜻을 표현해 온 수많은 글과 말 가운데 독자에게 그 요체를 전할 수 있는 부분을 골라내어 실었다.
강요배는 그림 작업이 “평평한 곳에 몸을 써서 마음을 나타내려는 의지”라고 말했다. 책 역시 납작하고 압축된 공간이지만, <풍경의 깊이>에는 화가 강요배가 사람·역사·자연을 직면하는 뜨거운 마음, 그가 지닌 오랜 연륜의 흔적, 예술을 향한 깊은 사유의 향이 짙게 배어 있다. 강요배의 정수를 담은 이 책이 품은 그윽한 향기가 독자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풍경의 깊이>는 화가 강요배가 지닌 마음의 풍경, 즉 “세계 속에서 중심을 찾아보려 안간힘을 쓰는 한 존재의 마음 궤적”을 따라가면서 이 땅에 새겨진 시간과 우리가 머무르는 자연을 음미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우주의 단독자로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마음의 무늬”를 그릴 수 있도록 이끈다.
<풍경의 깊이>는 자연과 역사, 민중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삶과 세계를 응시하며 강렬한 필치로 미적 영감을 표현해 온 화가 강요배의 예술 세계를 보여 주는 글 모음이자 그림 모음이며, 사유의 모음이다.
목차
1 나무가 되는 바람
마음의 풍경 20 / 제주, 유채꽃 향기 날리는 산자락 28 / 바람 부는 대지에서 32 / ‘서흘개’와 ‘드른돌’ 38 / 가슴속에 부는 바람 44 / 폭락 54 / 산꽃 자태 56 / 그림의 길 74 / 그림의 방식 90
2 동백꽃 지다
시간 속에서 128 / 4·3을 그리며 136 / 4·3 순례기 142 / 현장 연구원들의 겸허한 마음 150 / 탐라 177 / 한라산은 보고 있다 184 / 금강산을 그리며 192 / 봉래와 금강 197 / 휴전선 답사기 207 / 풀과 흙모래의 길 214 / 몽골의 푸른 초원 219
3 흘러가네
죽음에의 향수 228 / 각角 234 / 용태 형 238 / 마부 240 / 돈, 정신, 미술품 244 / 미술의 성공과 실패 253 / 창작과 검증 272 / 어려운 날의 미술 283 / 공재 윤두서 선생 측면 상 292 / 예술이란 무엇인가 294 / 무엇을 할 것인가 296 / 제주 굿의 시각 이미지 300 / ‘그림’이란 무엇인가 310 / 사물을 보는 법 316
강요배와의 대화 바람에 부서지는 뼈들의 파도 노순택 326
『풍경의 깊이』에 부쳐 시간 속을 부는 바람 정지창 364
후기 서쪽 언덕에서 372
도판 목록 375
출처 378
책 속에서
P. 14영혼이 맑고 예민한 친구들은 순수한 영감을 받아 그 무엇을 그리거나 썼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게 그림은 이 세계와의 싸움인 동시에 나와의 싸움, 즉 내 속의 무수한 인격들, 내 속의 이질적인 체험들, 내 속의 모순적인 가치 체계들의 싸움일 뿐이다. 그 팽팽한 긴장과 격렬한 싸움을 통해 내가 미처 모르는 ‘나’를 찾는 것, 내가 형성해야 할 ‘나’를 찾는 과정일 뿐이다. 접기

P. 72소가 되새김질하듯, 재료들이 내 안에 들어와서 5년도 되고 10년도 되고 그렇게 한참 지나서 적당할 때 그려 보는 거다. 그런데 그것들에는 격한 것, 잔잔한 것, 은은한 것, 대비가 강렬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내 상태가 다소 격하다 하면 반대로 약간 조용한 것을 찾게 된다. 내가 너무 밍밍하고 그러면 좀 더 격렬한 것을 끄집어내게 된다. 그러다 보니 현장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디테일보다도 대상의 핵심적인 측면이 강하게 다가온다. 접기

바람 속에는 수백 년 묵은 고목이 버티고 있다. 남쪽으로 쏠린 뼈가지를 하고, 마치 바람을 닮은 거대한 새처럼 바람을 타고 있다. 강한 바람은 인고의 생명을 안아 키운다. 바람과 나무는 서로를 멸하지 않고 서로를 만든다. 어쩌면 그것들은 하나다. 그 매운바람이 아니라면 저다운 나무로 살 수 없고, 또한 바람은 나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 바람은 영겁의 시간 속을 불어온다. 바람을 맞는 물과 돌과 땅거죽엔 시간이 각인된다. 장구한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물이 뒤집히고 눈발이 솟구치고 구름장이 찢긴다. 달과 별이 떨린다. 이 맵찬 바람 속의 풍경들 그리고 한차례 바람이 다 지나간 후 섬의 중심에 의연히 앉아 있는 새하얀 산, 한라산. 이것이 나에겐 참다운 풍경으로 비친다.
- 「마음의 풍경」 중에서 접기
P. 88‘추상’에서 ‘상’ 자는 이미지 ‘상’像 자가 아니고 코끼리 ‘상’象 자를 쓴다. 이미지나 형태에 국한된 개념이 아닌 것이다. 주역에 ‘괘상’卦象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어떤 요약된 본질, 압본壓本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어떤 사건의 핵심이랄까. 그리고 ‘사상’이라는 단어도 이와 관련된다. 그런데 갈수록 추상이라는 언어가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명료화가 아닌 ‘애매화’하는 것을 추상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단순히 기하학적인 것을 추상이라고 이해하곤 한다. 물론 수학 자체도 추상적인 것이니까 맞는 말이지만, 동양 철학에서 볼 때 추상은 시간 속에 흘러가는 ‘사건’을, 어떤 기의 흐름을 추출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본질, 골격을 중시한다는 의미다. 접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방식들의 최종 효과, 감동의 문제다. 성공적인 그림은 방식의 적절한 사용에 의해 참신해야 하고, 풍부해야 하고, 간결하며, 생동해야 한다. 그것은 먼저 창작자 자신을 놀라게 해야 하고, 다시 감상자의 마음을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 그가 그림 앞에 섰을 때, ‘어!…아하…야~’ 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그림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되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 「그림의 방식」 중에서 접기
P. 122진정한 분노 뒤에는 따뜻한 마음이 있다. 뜨거운 사랑이 있기에 분노가 가능하다고 본다. 복수초가 스스로 에너지를 내서 눈을 녹이듯이, 그런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P. 160저항은 삶을, 생존을 위한 것 아닌가. 어떠한 이념, 낙관, 슬픔, 비극, 이런 것들을 넘어서서 ‘생존 그 자체’에 가치를 둬야 하지 않겠느냐. 즉 우리는 ‘삶을 부정하거나 치장해서는 안 된다’라는 시각으로 먼 고려 시대부터 현대사까지 바라보자는 것이 착수하면서의 마음이자 끝나서의 마음이었다.
P. 169정치적 폭력은 민중의 몸에 죽음과 상처를, 마음에는 치유하기 어려운, 대를 잇는 오랜 후유증을 남겨 놓는다. 정치적 폭력은 보이지 않는 더 큰 구조나 기획이 은폐된 공간에서 광란하며 터져 나오는 현상이다. 심도 있고 광범위한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감시, 또는 포위만이 이러한 폭력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P. 174<시원>의 할머니에서부터 <기아>의 소녀 등 내 그림에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 <식량을 나르다>의 여인들은 남편이나 오라버니가 있는 산으로 간장과 소금을 지어 나르는 모습이다. 싸움에 일조한다는 생각도 있지만, 우선 생존, 먹고사는 것, 가족의 목숨을 지키려는 어머니이자 아내로서의 본능 같은 것을 담보하는 존재로서 여성의 모습을 그리려 했다. 금세기는 흙이 수난을 받고 약한 자들이 무수히 죽어 가고 짓밟히는 20세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근대사부터 현대의 광주까지. 몇 작품은 이런 역사를 여성성의 수난으로 상징해 본 것이다. 접기

금강산의 인상은 그 안에 피운 금강초롱꽃의 얼굴처럼 풋풋하고 순수했다. 신선과 선녀가 노닐고, 1만 2천의 나한과 보살이 금강계를 펼친다는 그곳은 어쩌면 마음의 경지인 듯도 하다. 먼 옛날 동방으로 흘러온 사람들은 마음의 거울과 같은 이 산을 그리워했다. 고대의 고분 벽화 속에 산악을 넘어 운무와 더불어 비천飛天하는 신선의 모습에서 오랜 염원을 본다. 또한 불심이 펼친 금강의 세계를 찾아 수많은 구도자가 이 산자락에 귀의했다. 풋풋하고 순수한 마음의 경지. 그것은 오랜 시간을 거쳐, 울울하고 첩첩한 공간을 돌아 강고한 인간의 제도를 뚫고 뚫어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우리 겨레의 이상향이 아닐까? 그 맑고 고운 기운은 이제 현실의 안개와 홍진에 휩싸여 꿈속에 두고 온 듯 아득하기만 하다.
- 「금강산을 그리며」 중에서 접기지은이
강요배
화가. 제주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미술 대학을 졸업했다.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1981)에 참여했고, 〈제주 민중 항쟁사〉 연작으로 개인전(1992)을 열었다.
이후 제주로 귀향하여, 제주의 자연과 이를 빌려 내면을 표현하는 방식을 탐구하고 있다.
〈제주의 자연〉(1994), 〈상象을 찾아서〉(2018) 등 23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15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화집 『동백꽃 지다』(1992, 1998, 2008)를 펴냈다.

책 소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강요배의 삶과 예술을 응축한 산문집이다. 강요배가 평생 그려 온 2,000여 점의 그림과, 그림에 담긴 뜻을 표현해 온 수많은 글과 말 가운데 독자에게 그 요체를 전할 수 있는 부분을 골라내어 실었다.
강요배는 그림 작업이 “평평한 곳에 몸을 써서 마음을 나타내려는 의지”라고 말했다. 책 역시 납작하고 압축된 공간이지만, <풍경의 깊이>에는 화가 강요배가 사람·역사·자연을 직면하는 뜨거운 마음, 그가 지닌 오랜 연륜의 흔적, 예술을 향한 깊은 사유의 향이 짙게 배어 있다. 강요배의 정수를 담은 이 책이 품은 그윽한 향기가 독자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풍경의 깊이>는 화가 강요배가 지닌 마음의 풍경, 즉 “세계 속에서 중심을 찾아보려 안간힘을 쓰는 한 존재의 마음 궤적”을 따라가면서 이 땅에 새겨진 시간과 우리가 머무르는 자연을 음미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우주의 단독자로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마음의 무늬”를 그릴 수 있도록 이끈다.
<풍경의 깊이>는 자연과 역사, 민중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삶과 세계를 응시하며 강렬한 필치로 미적 영감을 표현해 온 화가 강요배의 예술 세계를 보여 주는 글 모음이자 그림 모음이며, 사유의 모음이다.
목차
1 나무가 되는 바람
마음의 풍경 20 / 제주, 유채꽃 향기 날리는 산자락 28 / 바람 부는 대지에서 32 / ‘서흘개’와 ‘드른돌’ 38 / 가슴속에 부는 바람 44 / 폭락 54 / 산꽃 자태 56 / 그림의 길 74 / 그림의 방식 90
2 동백꽃 지다
시간 속에서 128 / 4·3을 그리며 136 / 4·3 순례기 142 / 현장 연구원들의 겸허한 마음 150 / 탐라 177 / 한라산은 보고 있다 184 / 금강산을 그리며 192 / 봉래와 금강 197 / 휴전선 답사기 207 / 풀과 흙모래의 길 214 / 몽골의 푸른 초원 219
3 흘러가네
죽음에의 향수 228 / 각角 234 / 용태 형 238 / 마부 240 / 돈, 정신, 미술품 244 / 미술의 성공과 실패 253 / 창작과 검증 272 / 어려운 날의 미술 283 / 공재 윤두서 선생 측면 상 292 / 예술이란 무엇인가 294 / 무엇을 할 것인가 296 / 제주 굿의 시각 이미지 300 / ‘그림’이란 무엇인가 310 / 사물을 보는 법 316
강요배와의 대화 바람에 부서지는 뼈들의 파도 노순택 326
『풍경의 깊이』에 부쳐 시간 속을 부는 바람 정지창 364
후기 서쪽 언덕에서 372
도판 목록 375
출처 378
책 속에서
P. 14영혼이 맑고 예민한 친구들은 순수한 영감을 받아 그 무엇을 그리거나 썼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게 그림은 이 세계와의 싸움인 동시에 나와의 싸움, 즉 내 속의 무수한 인격들, 내 속의 이질적인 체험들, 내 속의 모순적인 가치 체계들의 싸움일 뿐이다. 그 팽팽한 긴장과 격렬한 싸움을 통해 내가 미처 모르는 ‘나’를 찾는 것, 내가 형성해야 할 ‘나’를 찾는 과정일 뿐이다. 접기

P. 72소가 되새김질하듯, 재료들이 내 안에 들어와서 5년도 되고 10년도 되고 그렇게 한참 지나서 적당할 때 그려 보는 거다. 그런데 그것들에는 격한 것, 잔잔한 것, 은은한 것, 대비가 강렬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내 상태가 다소 격하다 하면 반대로 약간 조용한 것을 찾게 된다. 내가 너무 밍밍하고 그러면 좀 더 격렬한 것을 끄집어내게 된다. 그러다 보니 현장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디테일보다도 대상의 핵심적인 측면이 강하게 다가온다. 접기

바람 속에는 수백 년 묵은 고목이 버티고 있다. 남쪽으로 쏠린 뼈가지를 하고, 마치 바람을 닮은 거대한 새처럼 바람을 타고 있다. 강한 바람은 인고의 생명을 안아 키운다. 바람과 나무는 서로를 멸하지 않고 서로를 만든다. 어쩌면 그것들은 하나다. 그 매운바람이 아니라면 저다운 나무로 살 수 없고, 또한 바람은 나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 바람은 영겁의 시간 속을 불어온다. 바람을 맞는 물과 돌과 땅거죽엔 시간이 각인된다. 장구한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물이 뒤집히고 눈발이 솟구치고 구름장이 찢긴다. 달과 별이 떨린다. 이 맵찬 바람 속의 풍경들 그리고 한차례 바람이 다 지나간 후 섬의 중심에 의연히 앉아 있는 새하얀 산, 한라산. 이것이 나에겐 참다운 풍경으로 비친다.
- 「마음의 풍경」 중에서 접기
P. 88‘추상’에서 ‘상’ 자는 이미지 ‘상’像 자가 아니고 코끼리 ‘상’象 자를 쓴다. 이미지나 형태에 국한된 개념이 아닌 것이다. 주역에 ‘괘상’卦象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어떤 요약된 본질, 압본壓本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어떤 사건의 핵심이랄까. 그리고 ‘사상’이라는 단어도 이와 관련된다. 그런데 갈수록 추상이라는 언어가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명료화가 아닌 ‘애매화’하는 것을 추상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단순히 기하학적인 것을 추상이라고 이해하곤 한다. 물론 수학 자체도 추상적인 것이니까 맞는 말이지만, 동양 철학에서 볼 때 추상은 시간 속에 흘러가는 ‘사건’을, 어떤 기의 흐름을 추출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본질, 골격을 중시한다는 의미다. 접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방식들의 최종 효과, 감동의 문제다. 성공적인 그림은 방식의 적절한 사용에 의해 참신해야 하고, 풍부해야 하고, 간결하며, 생동해야 한다. 그것은 먼저 창작자 자신을 놀라게 해야 하고, 다시 감상자의 마음을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 그가 그림 앞에 섰을 때, ‘어!…아하…야~’ 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그림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되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 「그림의 방식」 중에서 접기
P. 122진정한 분노 뒤에는 따뜻한 마음이 있다. 뜨거운 사랑이 있기에 분노가 가능하다고 본다. 복수초가 스스로 에너지를 내서 눈을 녹이듯이, 그런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P. 160저항은 삶을, 생존을 위한 것 아닌가. 어떠한 이념, 낙관, 슬픔, 비극, 이런 것들을 넘어서서 ‘생존 그 자체’에 가치를 둬야 하지 않겠느냐. 즉 우리는 ‘삶을 부정하거나 치장해서는 안 된다’라는 시각으로 먼 고려 시대부터 현대사까지 바라보자는 것이 착수하면서의 마음이자 끝나서의 마음이었다.
P. 169정치적 폭력은 민중의 몸에 죽음과 상처를, 마음에는 치유하기 어려운, 대를 잇는 오랜 후유증을 남겨 놓는다. 정치적 폭력은 보이지 않는 더 큰 구조나 기획이 은폐된 공간에서 광란하며 터져 나오는 현상이다. 심도 있고 광범위한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감시, 또는 포위만이 이러한 폭력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P. 174<시원>의 할머니에서부터 <기아>의 소녀 등 내 그림에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 <식량을 나르다>의 여인들은 남편이나 오라버니가 있는 산으로 간장과 소금을 지어 나르는 모습이다. 싸움에 일조한다는 생각도 있지만, 우선 생존, 먹고사는 것, 가족의 목숨을 지키려는 어머니이자 아내로서의 본능 같은 것을 담보하는 존재로서 여성의 모습을 그리려 했다. 금세기는 흙이 수난을 받고 약한 자들이 무수히 죽어 가고 짓밟히는 20세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근대사부터 현대의 광주까지. 몇 작품은 이런 역사를 여성성의 수난으로 상징해 본 것이다. 접기

금강산의 인상은 그 안에 피운 금강초롱꽃의 얼굴처럼 풋풋하고 순수했다. 신선과 선녀가 노닐고, 1만 2천의 나한과 보살이 금강계를 펼친다는 그곳은 어쩌면 마음의 경지인 듯도 하다. 먼 옛날 동방으로 흘러온 사람들은 마음의 거울과 같은 이 산을 그리워했다. 고대의 고분 벽화 속에 산악을 넘어 운무와 더불어 비천飛天하는 신선의 모습에서 오랜 염원을 본다. 또한 불심이 펼친 금강의 세계를 찾아 수많은 구도자가 이 산자락에 귀의했다. 풋풋하고 순수한 마음의 경지. 그것은 오랜 시간을 거쳐, 울울하고 첩첩한 공간을 돌아 강고한 인간의 제도를 뚫고 뚫어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우리 겨레의 이상향이 아닐까? 그 맑고 고운 기운은 이제 현실의 안개와 홍진에 휩싸여 꿈속에 두고 온 듯 아득하기만 하다.
- 「금강산을 그리며」 중에서 접기지은이
강요배
화가. 제주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미술 대학을 졸업했다.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1981)에 참여했고, 〈제주 민중 항쟁사〉 연작으로 개인전(1992)을 열었다.
이후 제주로 귀향하여, 제주의 자연과 이를 빌려 내면을 표현하는 방식을 탐구하고 있다.
〈제주의 자연〉(1994), 〈상象을 찾아서〉(2018) 등 23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15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화집 『동백꽃 지다』(1992, 1998, 2008)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