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을 보며 신학놀이를 즐기다.
예술 감성에 기대어 기독교 신앙을 더욱 깊이 있게 다듬기 원하는 신자들, 기독교의 반지성주의에 염증이 나서 자칫 하나님까지 밀쳐둔 가나안 신자가 계시면 이 책에서 보물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서양종교화를 읽는 안목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로운 뜻까지 덤으로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쓰는 내내 위대한 화가들과 연애하며 지냈다. 그러나 이 연애의 끝은 결국 하나님으로 수렴된다. 이 책은 요즘 실험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신학놀이의 연장이다. 함께 신나게 놀이를 즐기시라.
- 지은이
지은이 소개
구미정
신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글 쓰고 강의하는 기독교 인문학자. 진지하고 심각한 신학 풍토 속 그녀의 이야기 신학은 자유롭고 경쾌한 놀이를 지향한다.
나아가 말과 글로 삶의 지혜를 나누는 창조적 놀이가 운동이 되어 교리와 교권, 현존 질서와 체제에 눌려있는 생명들이 하늘 숨을 쉬게 되기를 소망한다.
<두 눈 그 너머에서 세상을 보다>(공저), <구약 성서, 마르지 않는 삶의 지혜>, <교회 밖 인문학 수업>, <두 글자로 신학하기>, <한 글자로 신학하기> 등 여러 책을 지었다.
차례
여는 말
1. 성서
'오직 성서'만으로 충분한가
2. 천치창조
합리와 무지가 충돌할 때
3. 나그네
자발적 유목민이 된다는 것
4. 도시
소돔의 욕망을 해부하다
5. 언약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는 연애편지
6. 믿음
맹목과 광신을 넘어서
7. 아름다움
시선의 폭력과 욕망의 틈바구니에서
8. 가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9. 감정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
10. 헛됨
모든 것이 헛되나, 이것 하나만은
11. 공동체
유토피아를 꿈꾸다
12. 죽음
'메멘토 모리'해야 '아모르 파티'한다
그림 목록
책 속으로
그러니까 말씀은 눈으로 읽는 데서 그치면 안 된다. 귀로 듣고 흘려버려서도 안 된다. 성서에 기록된 말씀은 일차적으로 사건인 까닭이다.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으키는 사건이다. 빈센트의 성서 정물화는 이 점을 일깨운다. 종교적 위선에 찌든 신자들에게 몸으로 말씀을 살아내라고 주문한다. 기형도 시인의 시구를 패러디하면, 밑줄을 그어야 하는 건 “성경이 아니라 생활”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폭력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정주민(定住民)이 되기보다는 기꺼이 유목민(遊牧民)의 삶을 택한 것이다. 평생의 소유라고는 고작 가족을 위해 마련한 매장지가 전부였다.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한 자본주의가 야만적인 민낯을 드러내는 이때, 한 생을 나그네로 떠돌며 대안의 삶을 모색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가 왜 ‘믿음의 조상’인지를 깊이 성찰하게 한다.
성서를 읽을 때는 우리의 음험한 눈부터 씻어야 한다. 성서는 윤리 교과서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보석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구원이 나의 의로움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안다면, 남의 허물과 상처를 헤집기 위해 성서를 펼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다.
어느 시대든지 인간의 공동체 실험이 성공하기란 지극히 드문 법이다. 심지어 유토피아의 꿈은 종종 디스토피아(dystopia)가 되기도 한다. 빈센트의 꿈 역시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실패한 꿈이라고 해서 무의미하다거나 무가치하다고 섣불리 평가해서는 안 된다. 실패해서 더 아름다운 꿈도 얼마든지 많다. 정작 무서운 건 실패가 두려워서 꿈조차 꾸지 못하는 소심함이다. 아니 소심하다는 핑계로 꾸역꾸역 현실에 순응하면서 사는 비겁함이다.
그러니 꿈을 꾸자. 무릇 꿈이란 원대할수록, 이루기 어려울수록 가치롭다. 내공이 된다면 지금 우리가 몸담은 세상 말고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어도 좋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이 오로지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네 삶은 얼마나 비루할 것인가? 지금 여기서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를 이루려는 용감한 결단이 없고서야 불온한 시대를 어찌 건널 텐가? 그대와 내가 함께 손을 맞잡고 시린 몸을 녹일 수 있는 ‘노란 집’이 희망이다.
죽음을 ‘수용’한 거장의 검박함에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을 선구’하는 자세다. 삶의 끝에 버티고 있는 죽음을 미리 끌어당겨 지금 여기서 마주하는 것, 다시 말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를 새기는 삶이야말로 일인칭의 삶, 곧 다른 누구의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자기 삶을 사는 것이다. 죽음의 가장 큰 교훈이 삶인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한 번뿐인 삶,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을 불평과 원망, 절망과 후회로 일관하기보다는 차라리 반짝반짝 살아내는 편을 택한다.
미리보기









그림을 보며 신학놀이를 즐기다.
예술 감성에 기대어 기독교 신앙을 더욱 깊이 있게 다듬기 원하는 신자들, 기독교의 반지성주의에 염증이 나서 자칫 하나님까지 밀쳐둔 가나안 신자가 계시면 이 책에서 보물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서양종교화를 읽는 안목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로운 뜻까지 덤으로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쓰는 내내 위대한 화가들과 연애하며 지냈다. 그러나 이 연애의 끝은 결국 하나님으로 수렴된다. 이 책은 요즘 실험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신학놀이의 연장이다. 함께 신나게 놀이를 즐기시라.
- 지은이
지은이 소개
구미정
신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글 쓰고 강의하는 기독교 인문학자. 진지하고 심각한 신학 풍토 속 그녀의 이야기 신학은 자유롭고 경쾌한 놀이를 지향한다.
나아가 말과 글로 삶의 지혜를 나누는 창조적 놀이가 운동이 되어 교리와 교권, 현존 질서와 체제에 눌려있는 생명들이 하늘 숨을 쉬게 되기를 소망한다.
<두 눈 그 너머에서 세상을 보다>(공저), <구약 성서, 마르지 않는 삶의 지혜>, <교회 밖 인문학 수업>, <두 글자로 신학하기>, <한 글자로 신학하기> 등 여러 책을 지었다.
차례
여는 말
1. 성서
'오직 성서'만으로 충분한가
2. 천치창조
합리와 무지가 충돌할 때
3. 나그네
자발적 유목민이 된다는 것
4. 도시
소돔의 욕망을 해부하다
5. 언약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는 연애편지
6. 믿음
맹목과 광신을 넘어서
7. 아름다움
시선의 폭력과 욕망의 틈바구니에서
8. 가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9. 감정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
10. 헛됨
모든 것이 헛되나, 이것 하나만은
11. 공동체
유토피아를 꿈꾸다
12. 죽음
'메멘토 모리'해야 '아모르 파티'한다
그림 목록
책 속으로
그러니까 말씀은 눈으로 읽는 데서 그치면 안 된다. 귀로 듣고 흘려버려서도 안 된다. 성서에 기록된 말씀은 일차적으로 사건인 까닭이다.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으키는 사건이다. 빈센트의 성서 정물화는 이 점을 일깨운다. 종교적 위선에 찌든 신자들에게 몸으로 말씀을 살아내라고 주문한다. 기형도 시인의 시구를 패러디하면, 밑줄을 그어야 하는 건 “성경이 아니라 생활”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폭력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정주민(定住民)이 되기보다는 기꺼이 유목민(遊牧民)의 삶을 택한 것이다. 평생의 소유라고는 고작 가족을 위해 마련한 매장지가 전부였다.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한 자본주의가 야만적인 민낯을 드러내는 이때, 한 생을 나그네로 떠돌며 대안의 삶을 모색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가 왜 ‘믿음의 조상’인지를 깊이 성찰하게 한다.
성서를 읽을 때는 우리의 음험한 눈부터 씻어야 한다. 성서는 윤리 교과서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보석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구원이 나의 의로움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안다면, 남의 허물과 상처를 헤집기 위해 성서를 펼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다.
어느 시대든지 인간의 공동체 실험이 성공하기란 지극히 드문 법이다. 심지어 유토피아의 꿈은 종종 디스토피아(dystopia)가 되기도 한다. 빈센트의 꿈 역시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실패한 꿈이라고 해서 무의미하다거나 무가치하다고 섣불리 평가해서는 안 된다. 실패해서 더 아름다운 꿈도 얼마든지 많다. 정작 무서운 건 실패가 두려워서 꿈조차 꾸지 못하는 소심함이다. 아니 소심하다는 핑계로 꾸역꾸역 현실에 순응하면서 사는 비겁함이다.
그러니 꿈을 꾸자. 무릇 꿈이란 원대할수록, 이루기 어려울수록 가치롭다. 내공이 된다면 지금 우리가 몸담은 세상 말고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어도 좋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이 오로지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네 삶은 얼마나 비루할 것인가? 지금 여기서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를 이루려는 용감한 결단이 없고서야 불온한 시대를 어찌 건널 텐가? 그대와 내가 함께 손을 맞잡고 시린 몸을 녹일 수 있는 ‘노란 집’이 희망이다.
죽음을 ‘수용’한 거장의 검박함에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을 선구’하는 자세다. 삶의 끝에 버티고 있는 죽음을 미리 끌어당겨 지금 여기서 마주하는 것, 다시 말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를 새기는 삶이야말로 일인칭의 삶, 곧 다른 누구의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자기 삶을 사는 것이다. 죽음의 가장 큰 교훈이 삶인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한 번뿐인 삶,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을 불평과 원망, 절망과 후회로 일관하기보다는 차라리 반짝반짝 살아내는 편을 택한다.
미리보기







